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과거 ' 사노맹 사건' 과 연루돼 장관 자격이 없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사노맹 사건이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사노맹은 1989년 11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백태웅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와 박노해 시인 등이 출범한 조직입니다. 당시 사노맹은 1992년까지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건설하고 무장봉기로 혁명을 이룬 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결성됐습니다.
이들 조직은 1991년 4월 박노해 시인이 검거되고 이듬해 백태웅 당시 중앙상임위원장등 40여명에 가까운 인물이 구속되면서 와해됐습니다. 당시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사노맹은 전국의 노조 50여개와 대학 40여곳에서 조직원 1230여명을 뒀으며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인원은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국은 백태웅 교수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로 울산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3년 사노맹 산화 조직인 '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 설립에 참여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조국은 1993년 6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6개월간 구속 수감된 이후 대법원에서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확정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
대법원은 당시 조국에게 ' 반국가단체인 사노맹 활동에 동조할 목적으로 사과원에 가입하고 사노맹이 건설하고자 하는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성격과 임무를 제시했으며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촉구하는 내용이 수록된 ' 우리사상' 제2호를 제작, 판매했다' 고 밝혔습니다.
또한 ' 사과원은 단순한 사회주의 이론에 관한 학술 및 연구단체가 아니라 반제 반독점 민중민주주의혁명을 통한 노동자 계급 주도의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정치적 단체' 라고 명시했습니다.
이후 조국은 6개월간 수감됐다가 풀렸났으며 이후 백태웅 교수와 박노해 시인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1993년 3월1일에는 사노맹 관련자들이 모두 특별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습니다.
조국 후보자는 14일 ' 사노맹 사건'에 대해 '28년 전 활동을 숨긴 적 없다. 자랑스럽지도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다' 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20대 청년 조국은 부족했지만 국민들의 아픔과 함께 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그러겠다. 더 상세한 내용은 국회에서 말하겠다' 고 전했습니다.